가이사의 시대를 건넌 한 문장: ‘예수는 주’라는 고백이 바꾸는 일상

가이사의 시대를 건넌 한 문장: ‘예수는 주’라는 고백이 바꾸는 일상
교회 안에서 가장 자주 사용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주님”입니다. 기도할 때도 자연스럽게 “주여”라고 부르고, 찬송 속에서도 이 호칭은 자주 반복됩니다. 그러나 익숙함은 때로 의미를 흐리게 만듭니다. 성경에서 “주”라는 말은 단순한 존칭이 아닙니다. 예의 바른 호칭 정도로 축소할 수 없는, 매우 무거운 신앙 고백입니다. 이 말에는 권위와 통치, 소유와 순종, 보호와 신뢰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는 주”라는 고백은 예수님이 내 삶에 조언을 주는 분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성경의 큰 흐름 안에서 이 표현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구약의 헬라어 번역본인 칠십인역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자주 “퀴리오스”, 곧 “주”로 옮겼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히 “선생님”이나 “존경받는 분”이라는 의미를 넘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 하나님께 속한 영광과 권위를 돌렸고,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라 부르는 일은 그분의 신성을 흐리는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이 증언하는 진리를 따라 그분을 높이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바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린도전서 12:3).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지 입술의 발음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참된 믿음의 고백입니다. 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로마서 10:9)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구주이시며, 지금도 살아 계셔서 다스리시는 왕이심을 믿는 일입니다. 이 고백은 단지 교리 시험의 정답이 아닙니다. 사람의 존재 전체를 다시 정렬하는 진리입니다.
이 말의 무게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알면 더 또렷해집니다. 초대교회가 복음을 전하던 로마 제국은 황제의 권위를 절대화하던 시대였습니다.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는 일은 단순한 정치적 의무를 넘어 종교적 색채를 띠기도 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는 주”라고 고백했다는 것은 매우 선명한 선언이었습니다. 최고의 권위는 가이사에게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고백은 편안한 종교 언어가 아니라, 때로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사회적 배척이, 어떤 이들에게는 핍박이, 또 어떤 이들에게는 생명의 위협이 따랐습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이 한 문장을 놓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참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도 같은 진실을 증언합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사도행전 2:36)라고 외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어떤 순간에 비로소 주님이 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십자가, 부활과 승귀를 통해 그분의 주 되심을 공적으로 드러내시고 확증하셨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주권은 인간이 부여한 칭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밝히 드러내신 사실입니다.
이 고백은 교회의 역사 속에서도 흐려지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여러 도전과 논쟁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심을 붙들어 왔습니다. 그분은 피조물이 아니라 성부와 본질상 하나이신 아들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참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이 토대가 흔들리면 “예수는 주”라는 고백도 비어 버립니다. 그러나 정통 교회는 성경을 따라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함께 고백했고,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구원의 유일한 길을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말은 곧 그분이 구원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며, 우리의 믿음과 순종이 향해야 할 유일한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고백은 여전히 날카롭습니다. 우리는 로마 황제에게 분향하지는 않지만, 다른 주인들을 만들며 살기 쉽습니다. 성취가 주인이 되기도 하고, 돈이 주인이 되기도 하며, 사람의 인정이나 불안이 마음을 지배하기도 합니다. 겉으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지만 실제 결정은 늘 두려움과 욕심이 내리게 되면, 입술의 고백과 삶의 방향이 갈라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누가복음 6:46)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은 지금도 우리를 향합니다.
예를 들어 중요한 선택 앞에서 마음이 조급해질 때가 있습니다. 손해 보기 싫고, 남보다 뒤처지고 싶지 않아서 하나님의 뜻보다 당장의 이익을 먼저 붙들고 싶어집니다. 그때 “예수는 주”라는 고백은 추상적인 문장이 아니라 실제 기준이 됩니다. 내가 옳다고 느끼는 길보다 주님의 말씀이 먼저인가, 내가 편한 방식보다 정직과 사랑의 길을 택할 수 있는가를 묻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직장에서 작은 거짓말 하나쯤은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면 그리스도인은 결과보다 먼저 주님의 성품을 따라가야 합니다. 당장은 손해처럼 보여도, 주님의 다스리심 아래 있는 삶은 진실함의 열매를 맺습니다.
또 관계가 틀어졌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기를 지키려 합니다. 억울한 마음이 들면 쉽게 날카로워지고, 상대를 정죄하며 스스로를 의롭게 만들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로 모시는 사람은 자기 감정이 마지막 재판관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서 한 걸음 멈추고, 내가 붙잡는 의가 정말 복음에 합당한가를 돌아봅니다. 때로는 먼저 사과하고, 때로는 오래 참으며, 때로는 진실을 말하되 사랑으로 말하는 길을 선택합니다. 이런 선택은 약해서가 아니라, 내 삶의 왕좌에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모시기 때문에 가능한 순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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