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보다 먼저 멈춰 서는 마음, 호세아서가 비추는 하나님의 긍휼
긍휼은 판단보다 먼저 멈춰 서서 상대를 이해하고 회복의 가능성을 품는 마음입니다.
Bible Hab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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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보다 먼저 멈춰 서는 마음, 호세아서가 비추는 하나님의 긍휼
긍휼은 판단보다 먼저 멈춰 서서 상대를 이해하고 회복의 가능성을 품는 마음입니다.
Bible Hab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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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와 긍휼은 비슷하게 들리지만, 성경에서 이 단어들은 단순한 감정이나 예의 바른 태도보다 훨씬 깊은 뜻을 지닙니다. 긍휼은 상대의 형편을 멀리서 안타깝게 바라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를 향해 마음이 움직이고, 결국 삶의 태도와 행동까지 바꾸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긍휼은 약한 감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열매입니다. 우리는 흔히 분명한 기준을 세우는 일과 따뜻한 마음을 품는 일을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진리와 긍휼이 함께 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오히려 복음을 바르게 아는 사람일수록 타인을 함부로 단정하지 않게 됩니다. 자신이 먼저 심판이 아니라 자비를 입은 존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인상 깊게 보여 주는 본문 가운데 하나가 호세아서입니다. 북이스라엘이 우상숭배와 영적 간음으로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은 선지자 호세아의 가정을 통해 자기 백성의 상태를 드러내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겉으로는 종교적 모양을 갖추고 있었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제사는 드렸지만 순종은 없었고, 종교적 열심은 있었지만 언약에 대한 신실함은 무너져 있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세아 6:6). 여기서 ‘인애’는 언약적 사랑, 자비, 신실한 사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형식만 남은 종교성보다, 언약 안에서 흘러나오는 사랑과 순종을 기뻐하신다고 분명히 밝히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날카롭게 다가옵니다. 신앙생활이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옳고 그름을 빠르게 구분하는 데는 익숙해질 수 있지만, 무너진 사람을 향해 마음을 여는 일에는 둔해질 수 있습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 읽기를 이어 가고, 바른 교리를 고백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사람을 향한 태도 속에서 열매 맺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느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중심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긍휼은 진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를 아는 사람이 어떤 얼굴과 어떤 말로 사람을 대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복음의 열매입니다.
예수님도 이 말씀을 직접 인용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문제 삼았을 때, 주님은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9:13). 또 안식일 논쟁 속에서도 같은 뜻을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2:7).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규정과 구분에는 민감했지만, 사람의 비참함과 회복에는 둔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그들의 판단을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에 머무는지를 다시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배움입니다. 누군가의 실패를 보았을 때 우리는 사실을 충분히 듣기도 전에 평가부터 내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먼저 멈춰 서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단지 정죄에만 있는지, 아니면 회복으로 부르시는 데 있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물론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긍휼은 죄를 가볍게 보는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죄를 결코 옳다 하시지 않습니다. 죄는 언제나 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을 대하실 때에도 놀라운 자비를 나타내십니다. 그 절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는 죄인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믿는 자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이신칭의의 복음은 우리의 자존심을 낮추고, 동시에 타인을 대하는 태도도 바꾸어 놓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전적인 은혜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참으로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 앞에서 쉽게 우월한 자리에 서지 못합니다.
그래서 긍휼은 아주 일상적인 자리에서 드러납니다. 특히 가족 안에서 그렇습니다. 가장 가까운 관계일수록 우리는 더 쉽게 단정합니다. “또 저래”, “왜 저렇게 바뀌지 않지”, “말해 봐야 소용없어” 같은 생각이 쌓이면 마음은 점점 굳어집니다. 그러나 긍휼은 상대의 죄나 부족함을 못 본 척하는 것이 아니라, 회복의 가능성을 성급히 닫아 버리지 않는 태도입니다. 직장이나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수한 사람에게 냉소로 반응하는 대신 필요한 설명을 한 번 더 건네는 것, 지친 사람의 예민함을 무조건 인격 문제로 단정하지 않고 그의 형편을 헤아려 보는 것, 상처 입은 사람의 서툰 표현 뒤에 있는 두려움과 아픔을 살피려는 것이 긍휼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놓여 있던 세상을 떠올려 보아도 그렇습니다. 로마 제국 사회는 힘과 질서, 명예와 신분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약한 사람은 쉽게 주변으로 밀려났고,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존재는 존중받기 어려웠습니다. 그런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들이 전한 복음은 단지 천국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질서 자체를 새롭게 하는 소식이었습니다. 긍휼은 그 공동체가 세상과 구별되는 중요한 표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성과와 속도를 중시하는 문화 속에서, 약한 사람의 속도를 기다려 주는 일은 생각보다 강력한 복음의 증언이 됩니다.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원하시는 삶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8). 정의와 인자와 겸손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정의만 앞세우면 사람을 짓누르기 쉽고, 인자만 말하면 진리가 흐려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사람은 이 둘을 함께 붙듭니다. 그래서 긍휼은 흐릿한 관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낮아진 사람이 드러내는 성품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실천은 거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마음속으로 재판하듯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 듣기 전에 결론부터 내리는 습관을 멈추는 것, 실수한 사람에게 필요한 말은 하되 그 존재 자체를 깎아내리지 않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를 보며 ‘왜 저럴까’보다 ‘어디가 아픈 걸까’를 먼저 묻는 태도도 중요합니다. 때로는 말 한마디를 늦추는 것이 긍휼이고, 때로는 피하고 싶은 사람에게 먼저 평안히 인사하는 것이 긍휼입니다. 또 어떤 날에는 오래 참는 것이, 어떤 날에는 분명하게 권면하되 회복의 문을 닫지 않는 것이 긍휼입니다. 이런 묵상은 묵상이란 무엇인지 천천히 익혀 갈 때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긍휼은 우리의 성격을 다듬는 기술이 아니라 복음이 사람 안에서 맺는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붙드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구원하셨습니다. 긍휼은 선택 가능한 부가 요소가 아니라,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점점 나타나야 할 변화입니다. 오늘 누군가를 바라보는 내 눈빛, 쉽게 내뱉는 내 말, 마음속에 오래 쌓아 둔 판단 하나를 조용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제사보다 인애를 원하신다는 말씀은 결국 우리 신앙의 중심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비추어 줍니다. 그런 점검은 하루의 말씀 앞에 머무를 때 더 선명해질 수 있으며, 오늘의 말씀처럼 매일 주어지는 본문을 따라 자신을 비추어 보는 습관도 유익한 힘이 됩니다.